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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수고 정치편-그람시

김갑갑 2025. 9. 22. 14:27

 

 

  이 책은 말하자면 옴니버스식 사상서이다. 일정하고 명확한 하나의 주제 아래에서 차근차근 논리를 전개하는 긴 글이라기 보다는, 수많은 단상들을 엮어놓은 모음집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읽기 힘든 점도 있다.

  그러나 그 단상들은 서로 완전히 무관한 주제들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나름의 시리즈를 이루는 에피소드들도 있는데, 나는 다음 두 개의 시리즈가 특히 기억에 남아 적어보려 한다.

 

[1] 모든 여론과 세태는 일어날 만하여 일어난다.

<상황의 분석과 세력관계>, <대의제 통치체계에서의 수와 질>,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 etc.

  요약하자면, 사회현상의 인과관계는 매우 복합적이라는 것이다. 그람시 당시의 사상가들은, 사회현상에도 자연현상처럼 인과관계가 존재함을 깨닫고 그 원인들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람시가 지적한 문제는 사상가들이 가진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가 매우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혁명은 그 발생 원인이 루이 16세의 실정과 극심한 경제난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20세기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이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당시 상황을 보면서 혁명이 머잖아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대하던 폭발적인 혁명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람시는 바로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였다.

  <상황의 분석과 세력관계>에 위와 같은 주장이 실려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혁명은 단순히 민생이 파탄났다고 해서 자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민중 간(즉 혁명을 일으킬 계급 간) 충분한 혁명의식의 공유와 단결, 그리고 실제 위력이 갖춰져야 한다. 1789년 프랑스의 민생파탄은 이러한 궁극적 트리거에 이르는 하나의 사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원인의 일부였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경제난 이외에 부르주아들의 결집, 자유주의적 사상의 보급과 같은 원인들이 프랑스 혁명의 뒤에 숨어있었다.

  오히려 단순한 민생의 파탄은 민중의 심리적 황폐화를 초래하여, 혁명과 같은 적극적 활동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단결은커녕 분열과 각자도생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1차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그람시가 겪은 그 이탈리아에서 관찰된 바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기와 같이 지금의 이탈리아도 민중이 경제난을 겪고 있으므로 곧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단순히 기대하던 당시의 공산주의 세력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그람시는 비판한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대의제 통치체계에서의 수와 질>에서도 드러난다. 20세기 초의 유럽은 근대적 보편선거가(물론 여성 참정권과 같은 한계가 있었지만) 한창 시행되던 시기였다. 이때 '바보의 1표와 박사의 1표가 같은 가치를 지니는' 선거제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참으로 역사깊은 불만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 역시 인문현상의 인과성을 간과한 주장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개인의 판단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자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개인이 처한 사회상, 계급의 처지, 그리고 그때의 여론의 형성과 개인 간의 의견교환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하층 노동자의 1표는 어느 무식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의중을 대변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 계급의 여론을 인도한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관련 정당의 노선/주장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표본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요약하자면 '모든 일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같다. 그래서 '이런 초보적인 원칙을 왜 그람시가 굳이 강조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토록 당연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20세기 유럽의 기득권, 반동적 우파 계급은 급속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 사상과 크고작은 민중/노동자의 저항을 기이한 재변이나 이른바 혹세무민의 준동 정도로 취급했다. 이들도 앞서 말한 당시의 혁명가들처럼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희망사항이나 편견에 따라 현상을 격하하고 무시하였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요구사항이 적힌 슬로건을 내거는 것을 보면서 '저것들이 또 귀찮고 바보같은 짓을 하는군' 하고 치부해버린 것이다.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와 이전 에피소드들을 보면, 당대의 정치가들이 종종 공산주의 등의 낯선 사상을 '자생적'으로 취급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취급의 뉘앙스는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모를 기이한 전염병'을 대하는 태도와도 같아서, (오늘에도 흔히 볼 수 있는)염증이나 혐오와 흡사하다. 그람시는 바로 이러한 인식들을 어리석다고 지적하며, 세상에 완전히 자생적인 여론은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처럼 막대한 시류를 이루는 여론이라면,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이르는 기나긴 맥락의 누적과 사회적 여건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반동적 격하는 부분적으로는 의도된 공격이거나 여론전의 일환일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이또한 여태껏 말한 바와 같이,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진 인식이다. 그러므로 사회연구와 저항운동은 그 이유들을 엄밀하게 밝혀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세력들은 반동세력의 행동을 단순한 악의나 습성의 일종으로 치부하지 않도록 늘 자가경계해야 하며, 앞으로도 발견하게 될 무수한 충격적인 사태와 여론들을 결코 자생적으로 취급하여 얕보지 말고 그 근본과 인과관계를 찾아낼 관찰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그람시의 호소이다. 무엇보다도 그람시 본인이, 파시즘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단순한 기존 우익의 임시변통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결과를 혹독하게 맛보고 있었으므로, 그가 이런 주제에 공을 들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2] 정당이 해야할 일

<선동과 선전>, <비잔티니즘에 대한 거부> etc.

  그래서 정당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그람시의 실천적 대답이 이 에피소드들에 실려 있다. 흔히 기동전진지전으로 일컬어지는 그람시의 핵심적 사상과도 관련이 깊은 것 같다.

 

  앞서 말하자면, 그람시는 정치사회의 근본적 구성단위가 정당이라고 이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당이란,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당/공화당계 보수당(지금은 국민의힘)/그외 군소정당들과 같은, 정당법에 의해 설립된 엄밀하고 공식적인 정당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의미는 훨씬 포괄적이다. 즉, '지지세력을 두고 그들의 의지를 달성하기 위해 대표로서 활동하는 집단'을 모조리 일컫는다는 뜻이다. 그람시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책에서는 이탈리아)의 정부조차도 가끔씩 일부 지배적 계층을 위해 활동하는 하나의 정당으로서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람시의 문제의식도 바로 이 구조에서 출발한다. 정치적 무능력이란 바로 이러한 정당의 무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모든 계층과 집단은 마땅한 정당(즉 대표할만한 기구)이 없이는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 그리고 그람시가 정당의 역할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정당과 그 정당이 대표하는 집단 간의 적극적 상호작용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지집단과 대표집단 사이에서 중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식인 계층의 역할에 대한 강조이다.

 그람시는 PSI(이탈리아 공산당, 그람시의 이전 정당)의 부족한 실천력과 대중과의 상호작용의 부재로 인해 우익 반동 세력이 의회를 장악한 상황을 보면서  정당들이 본래적 역할에 소홀하여 '(노동자)대중, 곧, 자신들이 대표하여야 할 계층과 유리되어, 단지 그 정당의 이름이 그 계층의 학명(學名)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태는 단지 의회정치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다.특히 당시의 대학과 관련하여 그람시는, '국가의 지적 수준을 대표하고 발전시켜야 할 대학교와 등등의 학술적 기구들은 현실로부터 유리됨으로써 수사적이고 비실용적인 무능함에 빠져버렸다'고 강력하게 지적한다.

  따라서 모든 집단은 본래적 정당역할, 즉 지지계층과의 상호작용을 대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대학교든, 민간 기업이든, 지역사회의 주민 무임이든 마찬가지이다. 모든 집단은 스스로를 그 분야의 정당이자 구성원들의 대표로서의 역할을 자각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책무와 성원에 대한 상호작용에 충실할 때에야 비로소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발전과 승리를 항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