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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김갑갑 2025. 10. 3. 13:26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은 나치의 독일 집권기와 세계 2차대전 시기 전반의 유대인 학살을 실무적으로 담당/지휘한 사람이다. 그 죄로 1962년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집권기 독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하여 생존한 유대인 사회학자·철학자이다. 이 책은 아렌트가 이스라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관찰한 바를 토대로 쓰였는데, 특히 1심 재판 과정을 위주로 다루었다. 거기서 아이히만은 Moshe Landau 재판장에 의해 진행된 재판에서 Robert Servatius의 변호를 받았다.

  재판에서는 수많은 법적 쟁점이 있었지만,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춘 쟁점은 법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주제였다. 검사는 아이히만을 성격파탄자나 매우 잔인한 미치광이임을 밝히고자 했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유명한 주제인 악의 평범성(The Vanality of evil)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일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여야 한다. 첫 번째는 ①나치스의 전략, 두 번째는 ②아이히만의 '무능함'이다. 

 

  <①나치스의 전략>

  나치스는 초기에는 유대인을 학살한다고 하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나중에 가서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집어넣어 학살했지만, 그러면서도 '학살'내지는 '살해'라는 명칭이나 표현은 쓰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사용한 명칭이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격언이 있다. 생각의 한계는 곧 말의 한계이며, 말의 한계는 곧 생각의 한계인 것이다. 나치는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교묘하게 잘 사용했다.

 

  나치스가 붙인 홀로코스트의 공식 명칭은 유대인의 '소개'(Evacuation, 疎開, 이곳에서 저곳으로 보내 버리다)였다. 그들은 이렇듯 생소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 

  이 '소개'는 말 그대로, 유대인을 독일이나 독일의 점령지,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에서 내쫓는 작업이었다(직접 죽이는 것은 아니다). 이때 소개된 유대인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국가의 국적을 포기함은 물론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명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를 보면, 귀도와 그 아들이 복잡한 절차 없이  간단한 통보만으로 수용소행 열차에 올라탄다. 그들은 나치 집행관의 통보에 응하고 열차 탑승 대기열에 합류하는 순간, 자신의 국적과 법적 보호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이주(추방) 절차에 동의한 셈이 된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해외여행을 한 번 떠나는 데에도 여권 발급이나 비자 신청 등 귀찮고 수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한 나라의 국적을 포기하고 국외로 이주하는 과정이 별다른 행정절차 없이 그토록 간단하게 끝나는 것은 섬뜩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다. 실제로도 그 절차는 너무나도 간단한 나머지 거의 평온해 보일 지경이어서,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자신이 무슨 절차에 따르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행렬에 순순히 동참했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바로 이 행정절차를 설계·지휘한 사람이다. 책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만든 절차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아이히만)는 '협동라인작업'을 고안해 냈다."

 "시작 부분에 첫 번째 서류가 제출되면 · · · · 마지막에는 완제품으로 여권이 생산되는 방식이다. 

 "신청자(유대인)는 이제 더 이상 이곳저곳을 뛰어다닐 필요가 없었고 · · · ·단지 '당신은 2주일 안에 이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당신은 수용소로 보내집니다'라고 쓰인 여권만을 갖고 나오면 된다." (101~102p)

 

  이 절차는 그의 핵심 업적이었고 따라서 죄목이었다. 그가 만약 이 절차를 개발하지 못했더라면, 홀로코스트의 진행은 적어도 더뎌졌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이 업적을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홀로코스트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 소개 작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나치가 유대인을 단순히 이주시킨다고만 생각하여 거기에 동참하였다. 심지어 그는 이때 어느 정도의 선의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유럽에서의 반유대인 정서는 뿌리깊은 것이어서 당시에도 유럽사회 어디에서나 유대인들은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면 서로 불편한 동거를 할 바에야 아예 따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팔레스타인이나 마다가스카르(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다)로 유대인을 모조리 '소개'하여, 유대인들만의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는 계획에도 동참했다고 한다(아이히만은 이 계획을 자신이 최초로 발상했다고 주장하지만 허풍임이 틀림없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어쨌거나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대신 영국에 의해 이스라엘이 세워졌다).

  그러나 알다시피, 소개된 유대인들의 행선지는 팔레스타인도 마다가스카르도 아닌 유럽 각지에 세워진 수용소가 되었고, 결국 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학살당한다. 그리고 나치가 처음에 유대인의 추방을 '소개'라고 불렀듯이, 이 과정도 학살이나 처형이 아닌 '최종 해결책'이라는 생소한 명칭으로 불렀다. 이것이 바로 나치스가 사용한 전략이었다.

 


  <②아이히만의 '무능'>

  바로 여기서 아이히만의 '무능함'이 드러난다. 이 무능함은 실무자로서의 무능함이 아니다. 그는 실무자로서는 꽤 유능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지적하는 무능이란 바로 '말하기의 무능'과 '생각하기의 무능'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1심 재판을 내내 관찰하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아이히만이, 문장을 구사할 때 자신이 살던 나치 독일에서 사용되던 상투어나 선전문구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홀로코스트 작업에 대해 증언할 때 '유대인을 추방시켰다/강제이주시켰다'거나 '수용소에서 유대인 다수를 가스로 처형하였다'고 말한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소개'라거나, '최종 해결책'을 사용하여 '유대인이 소개되었다', '수용소에서는 최종 해결책이 시행되었다'와 같이 말했다. 이외에도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나 의도를 설명하고자 할 때 독일에서 쓰이는 카드게임 용어를 사용하는 등(비유하자면 법정에서 피고가 증언할 때 고스톱 용어인 '똥을 쌌다', '광을 팔았다' 와같은 표현을 쓴 것이다. 그래서 판사가 아이히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사전달이나 상황표현에 적절한 문장을 스스로 생각해내는 능력이 전무하였다고 아렌트는 지적한다.(105~106p)

  그리고 이러한 말하기의 무능은 생각의 무능을 낳았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 · · ·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106p)

 

  즉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무슨 일을 초래할지를 객관적으로 살필 능력이 없었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유대인의 소개' 과정을 생각해 보자. 조금만 고민해보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신원보장이나 국적도 없이 추방된 유대인의 무리가 대체 유럽 어느 나라에서 받아들여진다는 말인가? 인도주의에 기반한 국제법과 협약이 자리잡은 오늘날에도 난민의 수용은 어느 나라에서나 골칫거리인데, 1차대전을 막 치른 뒤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유럽땅에서 몇천 명도 아니고 수십~수백만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정처없이 추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간접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다(심지어 그들은 난민도 아니고 기존 국적을 멀쩡히 가지고 있던, 법적으로 정상적인 각국 국민들이었다).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모조리 수용소로 보내진 것은 정해진 것, 어쩌면(그리고 아마도) 나치에 의해 의도된 결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합리적 추론은, 나치에 의해 덮어씌워진 '소개'라느니, '최종 해결책'이라는 생소한 명칭들로 마비되었다. 과연 언어는 생각의 한계이며, 생각은 언어의 한계가 된다. 여기서 언어의 사용을 통제하는 것은 단순히 표현의 왜곡에 이르지 않고 생각의 왜곡과 불구화로 이어진다. 아이히만은 바로 이러한, 언어의 마비에 따른 생각의 마비를 잘 보여주는 끔찍한 예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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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생각은 순환적인 지지관계에 있다. 그러나 생각을 우리가 직접 다스리는 것은 힘들기에, 현실적으로 언어만이 우리의 생각을 형성할 수 잇는 유일한 수단이다. 바로 이처럼 언어의 사용을 중시한 것이 아렌트의 핵심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생각을 의심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그럴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상투어와 상투적인 생각이다. 별 생각 없이 답습되는 상투어는 그 자체로 우리의 생각 속에 돌처럼 눌러앉아, 유연한 사고를 저해하고 새로운 문장과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우리가 문화생활 속에서, 친구관계 속에서, 시사뉴스를 접하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사용하면서 답습하게 되는 상투어들과 상투적인 생각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들의 남용은 우리를 아이히만과 같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391p)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역자 서문에서 소개된 한나 아렌트의 핵심주장을 끝으로 독후감을 마치겠다.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준다. 나치스가 언어규칙을 만든 이유는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21p)

 

 "상투어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말-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2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