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책을 몇 권 꼽는다면 논어는 단연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유교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경직된 사상과 계급제도를 정당화하는 구시대적인 사상이라고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특히 19세기 말, 당시 조선의 폐쇄성에 성리학적 패러다임이 일부 원인을 제공한 탓에, 어떤 경우에는 개화를 가로막아 한국사의 치욕과 비극을 초래한 민족의 역사적 원수(怨讐)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2천 년간 하나의 문화권을 지배한 고전의 뿌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읽을 가치가 있음 역시 틀림없다. 심지어, 아니 오히려, 유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진 경우일수록 정확한 비판을 위하여 또한 궁극적으로는 문제 상황을 극복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유교라는 비판 대상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 뿌리가 되는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공자의 본래 가르침과 통상 여겨지는 유교규범의 경직적 이미지 간에는 세밀하고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공자의 가르침은 훨씬 온건하다. 그렇게 느낀 부분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윗사람을 존대하라고 하였지, 아랫사람을 하대하라고 한 적은 없다.
우선, 공자가 윗사람(군주, 부모, 어른, 상관)을 지극히 공손하게 대할 것을 책 내내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윗사람들로 하여금 아랫사람에게도 철저히 예의를 다할 것을 함께 강조하며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특히 간(諫)언으로 대표되는 그의 충(忠) 의식은, 단순히 상명하복으로만 단순화할 수 없으며 훨씬 복합적이고 소통 가능한 상하관계를 제시한다.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고, 신하가 군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하길, 군주는 신하를 예로써 다스리고, 신하는 군주를 충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八佾, 19
공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는, 인(仁)에 기반한 사람들의 성숙한 상호작용에 기반한다. 즉, 수직적 관계나 상하관계에서조차도 존중과 존대를 항상 강조할 뿐, 복종과 하대에 대한 언급은 책 전체를 통틀어도 찾을 수 없다.
2. 군군신신부부자자, 신분질서의 확립의 의도.
공자는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정명(正名)을 강조한다. 그는 계급질서의 확립을 추구하였는데, 이 때문에 수직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억압이 공자의 사상으로 포장되곤 한다. 그러나 공자는 그런 목적으로 정명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상은 역사 · 사회적 배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당시 중국은 춘추 · 전국시대로 알려진 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국가체계가 붕괴하여 하극상과 쿠데타가 가장 큰 사회문제였던 시기이며, 이때 공자는 그 사회문제를 정명을 통해 비판한 것이다. 즉, 공자가 정명 사상을 제시한 목적은 '권력투쟁이 초래하는 사회질서 붕괴 방지'이지, '경직된 인간 관계'가 그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는 공자의 가르침 내부에서도 정합적으로 일치되지 않는다. 공자가 정명과 더불어 줄곧 강조하는 덕치(德治)와 예(禮) 사상을 떠올린다면, 공자가 상하관계에서 무조건적인 복종과 경직된 상명하복을 지지한다는 해석은 어폐가 있다. 아래의 구절들은, 정명 사상이 단순히 경직된 수직적 관계를 지지하는 것이 아님을 뒷받침한다.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 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젊은이들을 두려워할 만하니, 그들의 내일이 오늘 사람들을 따라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
- 子罕, 23
子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농사짓는 소의 새끼가 털이 붉고 뿔이 단정하나, 사람들은 농사짓는 소를 제사로 바치지 않는다.
그러나 산천(즉 제사받는 주체)은 (농사짓는 소건 아니건) 신경쓰지 않는다.
- 雍也, 4
(필부의 자식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중용되어 마땅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처럼 공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관용과 상호존중, 즉 인仁에 기반한 성숙한 관계를 지향했다. 이는 상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되는 단순한 상명하복 관계가 공자의 지향점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며, 공자는 사회구조적으로는 엄격한 상하 구분을 강조하였다. 이 둘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이다. 즉, 인덕 있는 개인들이 스스로의 상관을 공경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계급질서가 철저히 유지되기를 바란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공자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역자 해제에 따르면, 결국 공자가 꿈꾼 사회체계는 엄격한 종법등급과 수직적 신분구조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질서이다. 비록 사회구성원들의 도덕적이고 자발적인 동기로부터 그 질서가 유지되고 지속되기를 바랐으나, 어쨌거나 그는 신분구조의 절대성을 주장하였고 이는 유가의 핵심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그는 제례를 신분질서 수호 수단으로서 중시하였다. 부모의 3년상을 준수하도록 당부하였으며, 천자(왕)만이 집전할 수 있는 제례를 제후나 그 아래의 야망가가 사사로이 집전하는 모습을 종종 거론하며 비판하였다. 공자에게 있어서 제례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실현함으로써 신분질서에 대한 존중과 자신의 본분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예禮의 실천 그 자체였다.
이는 공자의 교육관과의 관계에서 정합적으로 드러난다. 책의 역자는, 공자를 사회체계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나 정치 이론가보다 교육학자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이 평가는 독자로서 충분히 잘 납득되는 바이다. 공자는 지배계급이 인仁과 예禮에 부합하는 모범(즉 군자君者로서의 위용)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처럼 인으로 교화된 사회 구성원들이 아래로는 도덕적 모범을 보이고 위로는 공경하여 신분질서가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상황을 이상사회로 설정하였다. 즉 그는 교육이야말로 이상사회를 이룩할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특히 교육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때 덕과 인의 구체적 실천이란 앞서 설명한 예법과 예절, 제례를 준수하는 것으로 달성된다. 그것을 준수하는 것은 공경과 도덕을 드러내는 것임과 동시에, 덕과 의를 다시 함양하는 습習의 활동인 것이다. 이는 향당鄕黨 편에서 묘사된 공자 본인의 행실에서 잘 드러난다.
요약하자면, 그는 신분질서가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목표로 하였으며, 국가 전체가 인덕仁德으로 교화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교화의 핵심적 수단은 예법과 예절, 그리고 제례인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군권(왕권)의 절대성을 지지하였으며,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양대 시조로 여겨지는 맹자의 주장과 달리 어떤 경우에도 역성혁명을 거부하는 등 계급체계와 종법등급을 절대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가 겪은 시대상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이해할 만하다. 오늘날에는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당시로서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은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인 노魯나라였는데, 그곳에는 하은주 시대의 문화적 유산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기도 했다. 그는 찬란했던 주周나라의 몰락 이후 혼란상태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런 그가 우러러볼 것은 과거 하은주 시대의 고귀했던 예악禮樂문화뿐이었으며, 마침 그러한 의례를 주관하는 선비계층(고대 중국에서 이 계층을 유儒 라 하였으며 이것이 유교의 어원이 되었다)이었던 계급적 배경 역시 그가 주나라의 성군치세와 그 유산인 예악 문화를 동경하게끔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체제의 안정' / '예악 문화의 확립'으로 혼란을 예방하고자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정적으로 공자가 35살 때에 노나라에 큰 변동이 발생하였는데, 사소한 계기로 권세가들 간의 극심한 갈등이 벌어져 왕이 축출되고 꼭두각시가 즉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그는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고 뜻을 펼치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한다.
공자의 사상은 형식주의와 엄격한 신분계급적 질서를 절대적인 전제이자 목적으로 삼는다는 한계를 지닌다. 비록 그의 사상은 민본주의와 인치仁治, 덕치德治를 핵심으로 두었으나 한편으로는 사회의 유연한 구조변화를 저해하고 스스로 경직·형식화되는 문제점의 씨앗을 안고 있는 셈이었다. 결국 유교는 2천 년간 전제군주국의 체제 유지 이념으로 기용되면서 지나친 형식주의와 보수적 계급사회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되었고,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종법등급이나 신분질서가 무용하며 반대로 유용하고 역동적인 사회구조를 요구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데에 거의 완전히 실패하여 심각한 태생적 문제와 한계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공자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공자와 유교는 고대 중국의 사회상에서는 유용하였지만, 오늘의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한계와 문제가 있다. 인덕과 개인적 수양을 강조하는 공자의 의지는 여전히 고전으로서 가치를 지니지만, 유교의 이상적 사회상은 오늘날 곧이곧대로 수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가 그의 사상을 이해할 때에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였듯이, 유교를 오늘날에 이해할 때에도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공자 사상은 인격 수양을 강조한 고전 인문서이기도 하지만, 고대 중국 난세 위정자(혹은 위정학자, 공자가 실제 위정자는 아니었으므로)의 사례집으로서도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이해할 때에도 유교의 한계점으로 드러난 형식주의나 경직된 사회구조 자체에 매몰되기보다는, 당면했던 사회문제를 풀어나가는 공자의 도덕적 방향성, 그리고 혼돈을 예방하고자 분투했던 그의 고뇌를 폭넓게 이해하며 역사라는 위대한 시행착오의 일부이자 참고자료로서 이 책을 이해하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